피 묻은 처형대에서 깔끔한 액정 속으로
1757년 3월 2일 프랑스 파리의 그레브 광장, 국왕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의 육체가 광장 중앙에 묶였다. 달궈진 쇠집게가 그의 가슴과 팔다리의 살점을 뜯어냈고, 상처 위로는 끓는 기름과 유황이 부어졌다. 마지막으로 네 마리의 말이 그의 사지를 묶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여 육체를 찢었다. 국왕의 권력에 도전한 대가는 모든 군중이 목격하는 가운데 가장 기괴하고 끔찍한 폭력의 역사로 전시되었다. 이 시기의 권력은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로 인한 피비린내를 동반하는 일도 잦았다.
그로부터 불과 80여 년이 지난 1837년, 파리에 세워진 소년원의 하루 규칙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수감자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난다. 6시 15분에 기도를 올린다. 6시 30분에 작업장으로 내려간다. 모든 이동과 작업은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8세기와는 달리 프랑스 혁명 이후엔 산 채로 살점을 뜯어내고 사지를 찢는 가학적인 신체형은 사라졌다. 사형은 계속되었지만 도입된 단두대는 고통을 전시하기 위함이 아닌, 고통 없이 신속히 목숨을 끊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계의 분침 단위로 쪼개진 촘촘한 시간표와 침묵, 그리고 끝없는 규율이었다.
그 이후, 약 270년이 흐른 오늘날의 풍경은 어떨까? 대부분의 국가에서 광장의 처형대는 물론이고, 국왕의 칙령도 자취를 감추었다. 언뜻 보면 우린 권력과 억압으로부터 꽤 자유로워진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극적으로 보이는 전환들을 샅샅이 살펴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권력의 진화를 엿볼 수 있다.
현대의 주체들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수면의 질을 채점하고, 네비게이션이 출근길의 동선을 짜 주며, 알고리즘이 오늘 읽어야 할 뉴스를 편리하게 배열해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곧 신체를 파괴하는 권력에서, 신체를 길들이는 권력으로의 이행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 기술 발전의 결과를 넘어, 억압하는 폭군의 얼굴을 지운 권력자가 우리 삶을 기획하는 다정한 매니저로 위장한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주체들은 이 지배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확실한 자유를 반납하며 더 완벽한 통제를 갈구한다는 점이다. 폭력과 폭압에 맞서왔던 인류가 이제는 되려 '통제받지 못하는 상태'를 불안해하며 기꺼이 자기만의 감옥 문을 안에서 잠가 버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기꺼이 각자의 욕망과 궤적을 끊임없이 데이터로 헌납한다. 즉, '지배의 자발적 외주화'가 이뤄지고 있는 시대다.
폭군이 사라진 시대의 지배 공식
권력은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산소 같은 것인가?
전통적인 권력론은 단순하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왕이 신민을 지배하고,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고, 자본이 노동을 압도한다. 권력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수직적 관계이며, 그러므로 권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위계를 전복하거나 탈출하는 것이다. 그런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혁명이라 불렀다. 이렇듯 오랜 시간 인류는 이 질문에 대해 너무나도 직관적이고 쉬운 답만을 붙여 왔다.
21세기엔 우리를 지배하려는 국왕의 칙령이나 독재자의 총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 몇몇 예외적인 나라가 있긴 하지만 - 하지만 어쩐지 찝찝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 인간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알다시피 현대의 권력은 무언가를 강제하거나 금지하지 않는다. 대신 특정한 방향의 욕망을 승인하고 권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의 행동을 조율하는 알고리즘, 무엇을 성취해야 '성공한 삶'인지 끊임없이 외쳐대는 보이지 않는 기준과 지표들,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또한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를 우리에게 속삭이는 유혹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를 폭압하는 폭군은 육안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더 규칙적이고 완벽하게 조율된 삶을 살아가려 '애쓴다'.
이 정교한 지배의 실체를 해부하기 위해, 우리는 세기의 경계를 넘어 사유의 궤적을 쫓아갈 것이다.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 거장들의 통찰을 복습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예리한 사유마저 철저히 농락하며 진화해 버린, 2026년 현재의 '권력의 궁극적 형태'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기 위함이다.
권력의 계보학
01. 마키아벨리의 오해: 권력은 잔인한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가 1513년에 집필하기 시작한 『군주론(Principe)』에서의 핵심은 무자비한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다. 권력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로 굳어져,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계산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나 "군주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그의 문장은 자주 인용되지만, 정작 그가 말하려 했던 핵심은 늘 잘려 나간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것은 1513년, 피렌체 교외의 작은 농장에서였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복귀로 인해 공직에서 쫓겨났으며 고문까지 당한 뒤 정치의 중심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다. 역설적이게도, 권력의 문법을 가장 냉정하게 해부한 글은 권력의 바깥에서 쓰였다.
그는 권력은 획득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려우며, 노골적인 폭력은 결국 피지배자의 분노를 임계점 너머로 밀어올려 지배 체제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가 아니라 '동의'다. 민중이 군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든 증오로 전환될 수 있지만, 민중이 군주를 필요로 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훨씬 안정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 그러나 미움을 사지 않으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두려움'이 아니라 '미움을 사지 않으면서'에 있다. 피지배자의 동의를 구조화하는 것. 가장 견고한 권력은 지배받는 자가 그것을 지배로 느끼지 않을 때 완성된다. 이것이 물리적 폭력에서 심리적 조율로 권력이 진화하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전술이 아니다. 권력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이 통찰은 약 260년 후, 런던의 한 철학자에 의해 전혀 다른 형태로 구체화된다.
02. 벤텀의 원형 감옥: 감시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
1791년,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텀은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의 감옥 설계도를 제안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함께 도시로 밀려든 빈민과 범죄자들로 인해 당시 유럽의 감옥은 통제 불능의 포화 상태였다. 철저한 공리주의자였던 벤텀은 형벌이 다미앵의 처형처럼 비합리적인 복수의 스펙터클이 되어서는 안 되며, '최소의 비용과 인력으로 최대의 통제 효과'를 내는 기계적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원형의 건물, 중앙의 감시탑, 그리고 빛이 역방향으로 비추도록 설계된 창문. 이 구조의 핵심은 수감자들이 항상 감시받을 수 있지만, 실제로 감시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벤텀의 판옵티콘 설계는 당시 교도소 개혁안으로 제출되었지만 실제로 건설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에 담긴 권력의 논리는 훨씬 더 큰 규모로, 훨씬 더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 곳곳에 이미 구현되어 있다.
판옵티콘의 작동 원리는 단순하다. 감시자가 항상 모든 것을 볼 필요는 없다. 그 목적은 수감자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데 있지 않았다. 수감자가 '항상 감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그렇게 물리적 폭력이 사라진 자리를 심리적 압박으로 대체하며, 억압은 마침내 가장 경제적인 통제망으로 진화했다.
이후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5)에서 벤텀의 판옵티콘을 근대 권력의 작동 방식 전체를 설명하는 메타포로 확장했다. 그에 따르면 감옥만이 판옵티콘이 아니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근대의 모든 규율 기관이 판옵티콘의 논리 위에서 작동한다고 보았다. 정해진 시간에 출석하고, 정해진 자리에 앉고,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모든 구조가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내면화된 감시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03. 푸코의 미시권력: 권력은 흐른다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다.
푸코의 이 명제는 서양 정치철학의 오랜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홉스는 권력을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으로 보았고, 마르크스는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적 관계로 파악했다. 그들의 권력론에서 권력은 항상 '누군가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푸코는 "권력은 아래로부터 온다"며, 권력이 누군가의 독점물이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에서 모세혈관처럼 번져 나가는 담론의 그물망이라 보았다. 여기서 주체는 권력의 억압을 받는 피해자인 동시에 그 권력을 일상에서 재생산하는 톱니바퀴가 된다.
푸코는 묻는다. 당신이 매일 아침 양치질을 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게 만드는 것은? 특정한 직업이 '성공한 삶'이라고, 특정한 몸의 형태가 '건강한 것'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이 모든 것에 명령을 내리는 군주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규범들은 우리의 삶을 빠짐없이 구조화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미시권력(micro-power)'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모든 지점에서 모세혈관처럼 순환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이 모든 관계망 속에서 권력은 끊임없이 흐르고,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권력은 아래로부터 온다. 즉, 권력 관계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단번에 나누는 이원론적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통찰이 이전까지의 권력에 대해 전복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권력을 가진 자를 타도하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명한 혁명의 논리이자 정의였다. 그러나 미시권력은 특정한 소유자가 없다. 그것은 타도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동시에 행사하고 또 행사받는 관계의 그물망이다. 현대인은 권력의 억압을 받는 피해자인 동시에, 그 권력을 일상에서 재생산하는 톱니바퀴 그 자체다.
04. 들뢰즈의 도약: 규율에서 통제로
푸코가 세상을 떠난 1984년, 그의 작업을 이어받은 질 들뢰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990년 발표한 짧은 에세이 「통제 사회에 대한 후기(Postscript on the Societies of Control)」에서 그는 근대의 규율 사회가 이미 새로운 형태의 권력 구조, 즉 '통제 사회'로 이행했다고 선언했다.
규율 사회는 공간을 기반으로 했다. 학교, 공장, 병원, 감옥 등 당신은 어딘가에 '들어가고' 또한 '나왔다'. 들어가는 동안 규율이 작동하고, 나오면 잠시 자유로웠다. 공간적 경계가 곧 권력의 경계였다.
그런데 통제 사회는 이 강력한 힘을 가진 공간의 경계를 소멸시켰다. 당신은 더 이상 어딘가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제 당신이 어디에 있든 간에 곧장 따라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에도 이메일이 울리고, 휴가 중에도 실적이 쌓이고, 집에서도 건강 데이터가 기록된다.
공장은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업은 개인을 끝없이 변조하는 사회를 만든다.
여기서 '변조'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규율이 '형틀에 맞춰 찍어내는 것'이라면, 통제는 '실시간으로 흘러가며 형태를 조각하는 것'이다. 당신의 행동은 끊임없이 측정되고, 그 측정값에 따라 당신에게 주어지는 환경이 미세하게 조정된다. 문제는 당신은 그 조정을 시스템의 강요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환경이자 자기 삶의 일부로 경험할 뿐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대 권력론'의 정점이다. 흔히 말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우리의 데이터를 수집해 은밀하게 행동을 통제한다는, 오늘날 기술 비판의 표준적인 레퍼토리다.
그러나 이젠 이조차도 낡은 주장에 불과하다. 들뢰즈의 예언은 절반만 맞았다. 그의 말에 따라 권력은 주체를 끝없이 변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삶을 염탐하고 감시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는다. 즉, 그 주체는 변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통제를 갈망하는 현대의 군상
2006년, 유튜브가 설립된 지 1년 만에 구글에 인수될 때, 그 어떤 계약서에도 '당신의 다음 30분을 설계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전 세계 시청 시간의 70% 이상을 생성한다. 당신이 다음에 볼 영상을 '선택'한다고 느끼는 순간, 사실 그 선택지는 이미 알고리즘이 당신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변조'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플랫폼 알고리즘이 고전적 권력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것이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튜브는 당신에게 특정 영상을 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넷플릭스는 당신에게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지시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은 당신의 욕망을 직접 조작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당신의 과거 행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신이 좋아할 것을 예측하고, 그것을 다음 화면에 배치할 뿐이다.
과거의 인문학자들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몰래 통제한다고 믿고 이를 경계했다. 그러나 오늘날 빅테크와 플랫폼 자본주의가 완성한 권력의 궁극적 형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현대의 주체들은 알고리즘에 의해 은밀히 통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에게 제발 나를 통제해 달라고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이 내 취향과 엇나간 콘텐츠를 제시할 때, 현대인은 "알고리즘이 내 자유의지를 침해했다"며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요새는 볼 게 없네."라며 싫증을 느낀다. 그들은 더 많은 '좋아요'와 시청 데이터를 플랫폼에 적극적으로 먹임으로써, 시스템이 자신을 더 완벽하게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성실히 학습시킨다.
하지만 대개 알고리즘의 예측은 정확하다. 당신이 어떤 콘텐츠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어느 지점에서 스크롤을 멈추는지, 어떤 댓글에 반응하는지를 초 단위로 추적한다. 그리고 이 데이터의 축적은 당신이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욕망의 패턴, 두려움의 패턴, 분노의 패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일례로 2014년, 페이스북은 약 70만 명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방식과 결과는 간단했다. 뉴스피드에 긍정적 콘텐츠 비율을 높인 그룹은 더 긍정적인 게시물을 작성했고, 부정적 콘텐츠 비율을 높인 그룹은 더 부정적인 게시물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동안 사용자들은 자신의 감정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스마트 헬스케어 시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수십만 원을 지불하고 애플워치를 손목에 찬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의 피로도를 감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면 앱이 분석한 '수면 점수 85점'이라는 데이터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잘 잤다"고 인식한다. 내 신체와 내 감정에 대한 판단 권한마저 데이터를 쥔 권력에게 자발적으로 이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시가 아니다. '통제의 외주화'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은 이토록 통제를 갈망하는 걸까? 무한한 정보와 선택지가 주어지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유'는 이제 축복이 아니라 심리적 과부하이자 거대한 피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체는 불확실한 자유의 짐을 짊어지느니,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데이터 권력에게 삶의 큐레이션을 맡기고 안도한다. 그것이 훨씬 더 편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꿈꿨던 지배의 이상, 즉 '미움을 사지 않으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실리콘밸리는 다른 방식으로 달성했다. 그리고 들뢰즈는 권력의 '변조'를 경고했지만, 오늘날의 주체는 자신이 '정확하게 변조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권력이 나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내가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 무엇을 소비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모든 정답을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동의를 넘어선 '갈구'의 상태에 가깝다. 폭력도, 억압도, 심지어 감시받는다는 불쾌감도 없는 가장 완벽하고 매끄러운 통치. 권력은 이제 인간의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의 피로를 먹고 자란다.
권력은 존재하는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권력은 존재하는가?
마키아벨리는 권력이 군주의 손에 있다고 생각했다. 벤텀은 그것이 건축의 구조 속에 있다고 보았다. 푸코는 권력이 관계의 그물 안에 편재한다고 말했다. 들뢰즈는 그것이 이제 공기처럼 우리를 감싼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젠 그 안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들의 사유는 한 방향을 가리킨다. 권력은 당신이 의식하는 순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 가장 완벽하게 작동한다. 현대의 권력은 구원자이자, 개인 비서이자, 가장 친절한 컨설턴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의 권력이 인간의 육체를 가두는 감옥이었다면, 오늘의 권력은 인간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안락함을 느끼는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다.
푸코는 저항 없는 권력은 없다고 말했다. 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저항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저항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답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알고리즘의 서버가 내려간 날, 현대인은 혁명을 일으키는 대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패닉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당신은 오늘 몇 번이나 알고리즘의 추천을 따랐으며, 그 순간들 중에서 당신이 진정으로 선택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 해방이 아니라 무능력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이 권력을 향해 무엇을, 또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아니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거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반항이란 인간의 정수를 이젠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질문은 여기서부터 다시 쓰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