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 01

신화의 귀환: 고대의 신들이 떠난 자리를 채운 것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래 우리는 인류가 마침내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믿어왔다. 21세기는 현미경과 망원경이 세계의 비밀을 보여주고,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삶의 방향까지 지시해 준다. 이는 얼핏 보기에 완벽한 이성과 과학의 시대처럼 보인다. 번개를 내리치는 제우스도 바다를 분노로 뒤덮는 포세이돈도 더 이상 우리의 일상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처럼 고대의 신들이 떠나고 영웅들의 장엄한 서사가 증발해 버린 공간은 이제 인간의 이성으로 빼곡히 채워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신화의 시대와 결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화란 단순히 고대의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종교적 미신이 아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세계의 혼돈을 이해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세워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체계’다.

그 시선으로 현대의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 보자. 우리는 신의 제단을 허물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고 압도적인 새로운 신들을 모셔두었다. 천상의 구원이 사라진 자리를 꿰찬 것은 ‘자본’이라는 이름의 전능한 절대자다. 고대 영웅들의 고난과 모험담은 ‘경제적 자유’라는 세련된 물질적 구원의 서사로 옮겨갔다. 특히 오늘날의 디지털 자본주의 체제에서 ‘브랜드’라는 개념은 단순한 경제 유행어나 재테크 방법론을 넘어, 현대인의 삶과 욕망을 뿌리부터 규정하는 우상으로 군림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스스로를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체라 여길 수 있을까? 실상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열렬히 ‘성공’이라는 현대 신화에 맹목적으로 복무하면서 말이다. 노동의 굴레를 벗어난 절대적인 부의 축적, 알고리즘과 시장의 변덕 앞에서도 나의 시간과 삶을 온전히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통제의 환상. 이것은 현대인이 매일 아침 모니터 화면을 마주하며 기원하는 새로운 종교적 제의(Ritual)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인류는 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맹신하도록 설계되었는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수치로 증명해 내는 이 차가운 이성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성공과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체계는 어째서 이토록 맹목적이고 단단한 진리로 승격되었을까. 매일같이 땀 흘리며 좇는 이 눈부신 목표들은 과연 온전한 나의 열망일까, 아니면 시대가 정교하게 빚어낸 또 다른 맹목의 신화일까. 무너진 신전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걷는다.

Section 02

역사는 어떻게 ‘자연스러운 진리’로 위장되는가

한 시대의 유행이나 지배적 가치관이 의심할 여지 없는 상식으로 등극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언어의 교란이 숨어 있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957년에 펴낸 『신화론(Mythologies)』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대중문화를 빌려 자신들의 특수한 이익을 인류 보편의 원칙처럼 둔갑시키는 경로를 추적했다. 그가 보기에 신화란 고대의 유물이 아니라 ‘의도를 숨긴 채 역사의 산물을 원래부터 거기 있던 자연의 법칙처럼 위장하는 언어 작용’이었다. 바르트는 이로써 세계를 기호로 해독하는 새로운 안경을 우리에게 건넸다.

그 안경을 쓰고 신화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중 나선의 구조가 드러난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일반 언어 체계 위에 한 층을 더 얹은 ‘2차 기호학적 체계’다. 1차 언어 체계에서는 소리나 문자 같은 ‘기표(Signifier)’와 그것이 가리키는 개념인 ‘기의(Signified)’가 결합해 하나의 완성된 ‘기호(Sign)’를 이룬다. 검색엔진 로직을 분석하고 밤을 새워 콘텐츠를 채워 넣는 디지털 노동(기표)이 광고 수익 창출(기의)이라는 개념과 만나 ‘온라인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명확한 기호로 빚어지는 식이다.

신화는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그 사물로부터 구체적인 역사성을 철저하게 증발시키고, 그것을 영원불변의 자연으로 탈바꿈시킨다.

— 롤랑 바르트, 『신화론』

사태는 이 결합물이 2차 체계인 신화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벌어진다. 신화는 1차 체계가 피땀 흘려 빚어낸 구체적 현실 기호를 통째로 삼킨 뒤 그 안에 깃든 고단함이나 불확실성 같은 내용물을 가차 없이 비워낸다. 맥락을 빼앗기고 알맹이가 사라진 자리는 순식간에 텅 빈 껍데기로 전락한다. 신화 제작자들은 이 비워진 껍데기 속에 시대가 요구하는 환상, 즉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완전한 자유’나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벌리는 안락함’이라는 판타지의 기의를 주입하여 마침내 현대의 우상을 완성한다.

기호들이 안개 속에서 겹쳐지며 새로운 의미로 재편되는 시각적 도식

역사를 자연으로 위장하는 언어 작용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노동 본연의 ‘물질성’이다. 거대 플랫폼이 부과하는 수수료의 압박, 정책 한 번 바뀌면 트래픽과 가치가 무참히 폭락하는 취약함, 무수한 프리랜서들과의 피 말리는 경쟁 같은 구조의 모순은 신화의 안개 속에서 말끔히 세탁된다. 현실을 정화해 결백을 부여하는 환영 속에서, 구조적 결함을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 결과 대중은 눈앞의 시스템을 불평등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로 읽어내는 감각을 잃는다. 시스템 안에서 낙오하거나 성공하지 못한 비극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약탈적인 시장 구조를 의심하는 대신 자신의 긍정 마인드셋이 부족했다거나 실행력이 모자랐다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소진한다. 신화가 쳐놓은 촘촘한 그물망은 이토록 무해한 얼굴을 한 채 권력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우리가 질문을 멈추고 스스로 순응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Section 03

현대의 신화 해체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렌즈를 오늘날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화두인 ‘경제적 자유’와 ‘자동화 수익 체계’ 위에 올려놓으면 우리는 마침내 일상의 성소를 지배하는 우상의 실체와 마주한다. 임금 노동의 사슬을 끊고 시간의 주권을 손에 쥐겠다는 파이어(FIRE) 운동이나 지리의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노마드의 열망은 얼핏 기존 체제에서 빠져나오려는 실존의 몸짓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신자유주의가 정교하게 빚어낸 새로운 주체화 기제가 깊숙이 작동한다.

그 기저를 해부하려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분석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시장의 경쟁 원리를 내면화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경영해야 할 자본으로 간주하는 ‘자기 경영자’의 재탄생을 경유해야 한다. 푸코가 짚어낸 인적 자본 이론에 따르면 현대인은 자신의 기술과 지식, 시간 관리 능력은 물론 무형의 감정 상태와 인적 네트워크까지도 미래 수익을 위해 투자할 자산으로 인식한다.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들어오는 구조를 짓겠다고 밤을 지새우며 퍼스널 브랜딩에 매진하는 1인 비즈니스 주체의 폭발적인 움직임은 외부 권력이 가한 채찍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삶 전체를 가치 창출 단위로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 주체화 과정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터져 나온 최전선의 풍경에 가깝다.

착취자가 곧 피착취자인 역설의 원형 감옥에서, 강압은 바깥의 채찍이 아니라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안쪽의 심리 충동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기에 한병철이 진단한 ‘피로사회’의 사유의 지층을 곁들어 보자. 과거의 규율 사회가 병원이나 공장에서 외부의 금지와 부정의 명령으로 주체를 통제했다면, 현대의 성과 사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긍정의 과잉으로 개인을 떠민다.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는 1인 기업가들은 감시하는 공장장이나 권위적인 상사에게 노동을 강요받지 않는다. 오직 내면의 성공 의무감에 이끌려 스스로 수면을 줄이고 여가를 반납한 채 맹렬히 키보드를 두드릴 뿐이다. 겉으로는 완전한 자율의 실현처럼 보이지만, 이는 타인이 휘두르던 약탈이 스스로를 한계까지 쥐어짜는 ‘자기 착취’로 옮겨 앉은 상태나 다름없다. 노동을 수행하는 자아와 자본의 효율성을 감시하는 관리자가 한 몸에 공존하는 분열 속에서 현대의 노동자는 자신만의 노동 수용소를 몸속에 품고 다니는 교도관이자 수감자가 된다.

현대의 노동자는 자신만의 노동 수용소를 몸속에 품고 다니는 교도관이자 수감자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현대인들은 ‘부자가 되는 법을 판다’는 정보 상품의 폰지 구조를 정말 모르고 있어서 속고 있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사유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지나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정신분석학적 통찰로 들어설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과거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다”는 순진한 허위의식으로 정의했다. 지젝은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 작동 방식이 그러한 순진한 무지가 아니라 철저히 단련된 ‘냉소적 이성(Cynical Reason)’ 위에 서 있다고 폭로했다.

현대의 주체들은 자본주의 성공 서사의 허구와 플랫폼 알고리즘의 횡포를 이미 너무나 잘 안다. 다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행할 뿐이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이 분열을 지탱하는 핵심 기제가 ‘냉소적 거리두기’다. 많은 현대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성공 선지자’들의 천박함을 비웃고 시스템의 기만을 조롱하며 비판의 거리를 유지한다. 속물스러운 대중과 자신을 분리해 지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은 주체의 도덕적 거부감이나 쿨한 조소 따위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을 비웃으며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그 비판의 거리 자체가, 시스템의 압박을 견뎌내는 엔진으로 작동한다. 물질의 차원에서 보면 시스템을 경멸하면서도 수익에 일희일비하며 억척스럽게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그 실질적인 ‘행위’ 자체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무의식의 환상, 곧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거대 서사는 이 냉소적 복종의 메커니즘을 빌려 일상의 미시 권력으로 우리 삶을 한층 깊숙이 포획한다.

이 글이 단순 1인 기업가들의 지향점이나 독립을 위한 분투를 단순한 속물 탐욕으로 단정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직시할 지점은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 할수록, 도리어 자본주의의 가장 지독한 규칙에 스스로를 옭아매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Section 04

우리는 어떤 신화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신화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 있을까. 바르트는 일찍이 신화를 해체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또 다른 신화로 굳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했다. 자본의 논리가 모든 삶의 영역을 빨아들이는 이 시대에 시스템의 외부로 탈출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억압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서 냉소하며 산속으로 은둔하는 것은 실존적 도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신화를 완벽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좇는 이 목표가 시대가 주입한 허상임을 명확히 인지하는 메타적 시선을 확보하는 일이다.

여기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던지는 통찰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자신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린 바위가 결국 다시 무자비하게 굴러떨어질 것임을 투명하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체념하지 않고, 바위를 향해 다시 묵묵히 걸음을 내딛는 통찰의 순간을 통해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초극한다. 경제적 자유와 자동화라는 목표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임을 직시하면서도, 기꺼이 자신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기획하고 창조해 나가는 현대의 주체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신화에 굴복하여 거대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부조리 앞에서 다시 걸음을 내딛는 인물의 실루엣

부조리를 직시하고 다시 내딛는 한 걸음

나아가 이들의 실존적 반항은 단순히 마음가짐에 머물지 않고 가장 파괴적인 행동 양식으로 진화한다. 앞서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했던 냉소적 이성을 타파할 해법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규칙을 기괴할 정도로 철저하게 수용해버리는 ‘과잉 동일시(Overidentification)’ 전술에 있다. 산속으로 도피하는 대신,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효율성과 수치화의 논리를 한계치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지젝이 지적한 피동적인 냉소주의가 결코 아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것은 권력의 허위를 아래로부터 조롱하며 그 시스템을 자신들의 생존 도구로 뻔뻔하게 전유해 버리는 역동적인 ‘키니시즘(Kynicism)’의 현대적 발현이다. 이들은 알고리즘과 레버리지라는 자본의 냉혹한 언어를 체화하고 시스템의 맹점을 역이용함으로써, 자신들을 통제하려던 거시적 시스템을 도리어 자신의 발아래 둔다. 시대의 신화가 가진 모순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재건축하는 능동적이고 급진적인 저항의 형태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명료하다. 이러한 전복의 실천은 결코 순진한 사람들을 정보 비대칭으로 속여 이익을 취하는, 이른바 ‘성공을 상품화 하는 자들’의 방식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타인의 욕망을 약탈하여 배를 불리는 기만적 서사를 무시하고, 오직 시스템의 독점적 규칙을 해커처럼 전유하여 내 삶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통제권, 즉 ‘실존적 주권’을 탈환하기 위한 과정이다. 결국 신화를 해체한 폐허 위에서 우리가 쥐어야 할 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무의미에 맞서는 창조적 반항인 것이다. 거대 서사가 강요하는 환상에 속절없이 휩쓸리지 않고 내가 건설하려는 시스템의 본질을 질문하는 태도. 그것이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 진정한 자율성을 획득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