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 01

권력의 존재론적 분열과 고독의 심연

때는 1547년, 프랑스의 위대한 군주 프랑수아 1세의 장례식장이었다. 조문객들이 마주한 것은 악취를 풍기며 부패해가는 왕의 시신이 아니었다. 실제 시신은 무거운 납관 속에 봉인되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졌고, 그 위에는 왕의 생전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밀랍 인형이 위엄 있게 놓여 있었다. 화려한 대관식 예복을 입은 채 홀을 쥐고 있는 이 정교한 인형은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의례적 대접을 받았고 식사 의식마저 거행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관 속의 시신을 애도하면서도, 그 위에 놓인 형상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는 왕권을 마주했다. 훗날 ‘왕은 죽었다, 국왕 만세(Le Roi est mort, vive le Roi!)’라는 선언으로 울려 퍼질 이 이중적인 논리는 권력의 가장 아이러니한 진실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의 왕은 필멸하나, 주권이라는 추상적인 신체는 결코 죽지 않는다.

프랑수아 1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장 클루에 作). 1547년 그의 장례식에 놓인 밀랍 인형은 필멸하는 육신 위에 덧씌워진 불멸의 '정치적 신체'를 시각화한 대표적 사례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권력의 정점에 선다는 것은, 한 인간이 단일한 존재로 머무르기를 포기하고 복수의 층위로 분열되는 경험에 가깝다. 이는 단순히 타인을 통제하거나 자원을 배분하는 물리적 권한을 획득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영속성과 생물학적 유한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하는 제의적 과정에 더욱 가깝다고 봐야 한다. 권력자는 자신의 유한한 조건을 넘어 제도의 지속성을 대변하도록 요청받으며, 이 모순은 때로는 깊은 고독으로, 때로는 체계와의 완전한 동일시라는 또 다른 형태의 도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리더의 내면은 흔히 비범한 결단력이나 카리스마로 포장되어 왔으나, 그 심연에는 '자연인으로서의 나'와 '제도적 실체로서의 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극심한 충돌이 자리하고 있다. 독일의 역사가인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는 군주는 질병에 걸리고 늙어가는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와 국가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리더는 자신의 육신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결코 죽지 않는 권력의 영속성을 연기해야 하는 모순된 존재가 된다.

이번 글은 권력이란 것을 지배의 환희가 아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제도를 대변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숭고한 형벌'로 규정할 것이다. 또한 칸토로비치의 정치신학적 해부를 시작으로 이 가혹한 분열을 견디기 위해 권력자가 채택하게 되는 스토아 학파의 자기 통치론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유의 흐름이 어떻게 현대 비즈니스 제국의 정점에 선 인물들의 기행과 왜곡된 현실장으로 착지하는지 추적하고자 한다.

권력자의 고독은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결단을 내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권력의 구조적 본질이자 존재론적 숙명이다.


Section 02

왕의 두 신체: 권력자의 정치신학적 해부와 영속적 사회

에른스트 칸토로비치가 그의 저작 『왕의 두 신체』에서 추적한 서구 정치사상의 핵심은, 권력자의 존재가 단일한 생물학적 유기체로 환원되지 않도록 구성되어 왔다는 역사적·법학적 논리에 있다. 튜더 왕조 시대의 법학자들은 군주가 두 개의 신체, 즉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를 동시에 지닌다고 규정했다.

프랑스 왕실 장례 행렬을 묘사한 목판화
프랑스 왕실 장례 행렬을 묘사한 옛 목판화. 관 위에 놓인 왕의 형상(에피지)을 운구하는 이 전통은, 필멸하는 육신과 영속하는 '정치적 신체'가 나란히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자연적 신체는 우리 모두가 그렇듯 질병에 걸리고, 노쇠하며, 우연한 사고에 의해 손상될 수 있는 유한하고 필멸하는 생물학적 신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위에 덧씌워진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이고 영속적인 실체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생멸과 무관하게 존속하도록 설정된 ‘법적 인격체’를 의미하며, 생물학적 육신이 겪는 모든 결함과 죽음으로부터 분리된 영속적 형식으로 작동한다.

칸토로비치는 본래 그리스도의 몸과 성체성사를 가리키던 신학적 용어인 ‘신비체(corpus mysticum)’가, 중세를 거치며 점차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다시 12세기 이후에는 세속 권력의 영역으로 전이되어 국가라는 ‘법인체(corpus juridicum)’를 사유하는 틀로 재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개념적 이동은 단순한 비유의 차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동체를 하나의 실체로 응집시키는 사유 방식 자체의 이전을 의미한다. 더 이상 공동체는 개별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초과하는 하나의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군주의 신체는 단순한 육체를 넘어, 이 보이지 않는 신체가 현현하는 매개로 자리 잡는다. 말하자면, 유한한 인간의 육신 안에 국가라는 영원한 실체가 스며들어 현존하게 되는 일종의 정치적 ‘강생’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로써 권력은 더 이상 개인의 능력이나 덕성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을 통과하여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 정당화된다.

이러한 사유는 곧 법적 교리로 정식화된다. 법학자들은 “왕이 정치적 신체로서 행한 일은 자연적 신체의 무능력에 의해 무효화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군주의 육체적 결함과 정치적 권위를 철저히 분리한다. 이 분리는 단순한 이론적 장치가 아니라, 권력의 연속성과 통치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실천적 기술이었다. 그 결과,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정된 사실로 지니면서도 동시에 죽을 수 없는 권력의 불멸자로 의탁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정치신학은 하나의 역설적 구조를 완성한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은 죽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의 내면적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자연인으로서의 리더는 개인적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피로를 지닌 필멸의 존재이지만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는 자신을 향한 모든 자연적 결핍을 무효화해야 하는 불멸의 정치적 신체로 기능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 과정 속에서 리더의 내면은 두 신체가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영적 전쟁터가 되며, 통치를 위해 정치적 신체가 자연적 신체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가혹한 자아 분열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이 썩어가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결코 죽지 않는 권력의 영속성을 연기해야 하는 모순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두 신체의 교리는 현대 비즈니스 세계의 최고경영자(CEO)가 직면한 현상학적 현실을 제대로 보여준다. 에릭 산트너가 지적했듯, 군주의 신체가 해체된 이후에도 그 자리를 지탱하던 상징적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관료제와 법인이라는 형태로 재배치되어 지속된다. 불멸성은 더 이상 특정 인물의 육체에 깃들지 않지만, 여전히 제도와 규범의 형식 속에서 작동하며 현대의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자 이삭 아리엘 리드(Isaac Ariail Reed)는 이를 『근대의 권력』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양한 의미 체계와 행위의 층위가 결합되는 과정으로 분석했다. 이러한 관점을 확장해 보면, 우리의 일상적 사회는 이익 교환과 권력 투쟁이 교차하는 ‘거래적’ 차원 위에서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질서로 묶어내는 보다 지속적인 상징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개별 행위들의 파편적 연쇄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초과하는 어떤 지속성의 상상력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의 CEO는 단순한 의사결정자를 넘어, 조직의 지속성을 상징적으로 매개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구성원들은 리더 개인을 넘어서 조직이라는 법적 인격체의 연속성을 기대하며, 기업 역시 개별 구성원의 생애를 초과해 존속하는 제도적 형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리더의 결정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방향성과 지속 가능성을 대표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쉽다.

결국 이 구조 속에서 리더는 종종 개인적 감정과 제도적 요구 사이의 긴장을 경험하게 된다. 조직의 지속성을 우선시하는 판단은 때로 인간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책임감이나 피로와 충돌하며, 이로 인해 일정한 고립감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이 언제나 인간성의 완전한 배제나 자기 희생으로 귀결된다는 논리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오히려 리더십이란, 이 두 층위 —유한한 개인으로서의 자신과, 지속성을 요구하는 제도의 논리— 사이를 조율하는 과정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영속성을 둘러싼 상상력은 때때로 타자화와 권력의 비대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때 리더는 단순한 실행자가 아니라, 그러한 구조적 긴장을 인식하고 감내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따라서 리더십은 자신의 유한성을 완전히 지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식한 채 제도의 요구와 끊임없이 협상해 나가는 불완전한 균형의 기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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